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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p. 28

그들이 사슴을 쏘아 죽였지만 나는 도서실에 앉아 총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창문을 꼭 닫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단다, 하고 삼촌은 말했다.

흔히 생각하듯 세계가 단 한 가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수백만 가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 한 장소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똑같은 수백만 장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 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수 없이 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 한 나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모두 그때그때 최고로 아름답고 최고로 중요한 수많은 나라로 이루어져 있음도 깨우쳐 주었다. 인류는 온갖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지닌 무한한 것이지, 멍청한 인간들만 자기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 생각하고 있단다, 하고 삼촌은 말했다. 

p.494

몇백 명의 인간들만 그렇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틀림없이 수백만의 인간이 그럴 것이며, 수백 명이 아닌 수백만 명의 위선자, 수백 명이 아닌 수백만 명의 혐오스런 인간이 있다. 로마와 같은 도시에서 말하자면 더러운 정신을 씻어내고 로마라는 목욕물 속에 잠기자. 증오하는 자들의 발소리, 증오하는 자들의 음성, 증오하는 자들에게서 느끼는 치 떨리는 역겨움을  무덤가에서 생각했다.
그들은 어린이빌라만 더럽힌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더럽혔다. 무덤가에서 나는, 처음에는 삶이 두려웠다가 얼마 후 이 삶을 증오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우리가 로마를 해결책이라고 여긴다면, 그것 역시 착각이다. 

p.149
마음속으로 벌써 정해 놓은 단 한가지는 보고서의 제목을 '소멸'이라 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보고서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 즉 내가 볼프스엑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든 것, 볼프스엑을 의미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모두 볼프스엑 같은 것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을 소멸시키기를 원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없애 버림으로써 소멸시키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보통 우리는 그렇게 소멸시킬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때가 온 것 같아요, 내가 그럴 나이가 된 거지요,

p.348
나는, 소멸에서 셰어마이어가 이 사회로부터 빼앗긴 권리를 되찾게 해 주진 못하더라고 적어도 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며, 그것도 내 방식으로 하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소멸'은 이를 위한 최상의 기회이다.
수천수만 건의 이런 범행에 대해 우리 국민이 침묵하는 것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범죄다. 국민의 침묵은 섬뜩한 것이다. 국민의 침묵은 끔찍한 것이며, 이 침묵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보다 더 끔찍스러운 것이다 .
그들과 악수는 하지 않겠다. 그렇게 한다면 나 또한 공범자가 될 테니까. 다른 곳도 아닌 어린이빌라에,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한 건물에 우리 부모님은 이 비열한 범죄자들을 숨겨 주었고,…



p.469
때때로 광신적인 과장은, 말하자면 예술적인 과장술로 승화될 경우, 비참한 상태에 빠진 나를 구해 주고 정신적으로 권태에 빠진 나를 구해 주는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나는 감베티에게, 과장의 기술은 극복의 기술이며, 나에게는 실존 극복의 기술이라고 했다. 과장을 통해, 결국 과장술을 통해 실존을 견뎌내고 실존이 가능하다고 했다. 
실존을 극복한 위인은 언제나 뛰어난 과장술사였습니다.


p.114

이른바 사악한 정신의 도서실이란 것을 만들려고 당연히 몽테뉴, 데카르트, 볼테르 그리고 칸트의 책부터 사들이기 시작했지요, 마침내 게오르크 삼촌이 늘 말했던 대로 정신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었던 거지요, 물론 그 중심은 다름 아닌 쇼펜하우여였지요. 언제든지 쉽게 들락거릴 수 있는 도서실을 마련해두고 사악한 정신의 주저들을 사넣었지요, 

맨 먼저 볼프스엑에 있을 때 용납되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저서, 즉 치명적인 독약을 샀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의 작품도 하나씩 하나씩 사 나갔지요, 책 사는 일도 게오르크 삼촌이 일러준 대로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 그대로 했습니다. 내가 산 첫 번째 책은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었지요, 두 번째 책은 페터 헤벨의 『달력 이야기』라는 것을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이렇게 시작해서 크로포트킨과 바쿠닌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렸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 좋아했던 레르몬토프에 이르기까지 꽤 오래 걸렸답니다. 


p.202
어머니가 "너 도서실에서 도대체 뭘 했니?" 하기에 나는 "『지벤케스』를 읽고 있었는데요."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내 따귀를 때리면서 방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고 했지요,
우리 어머니는 『지벤케스』가 무언지도 모른 채 내가 그냥 자기를 놀리려고 하는 말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멸』, 류은희, 조현철 옮김.

2017년 10월,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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